갈릴리, 베다니 가까이 하기엔 좀 된다...
예수 사망에 관련해 지금까지 들어서 알고 있던 모든 지식을 머리속에서 잠시 지우고 읽으시길 권한다.
부활 예수
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직후 부터 부활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마태복음 누가복음 두 복음서 기록을 따라가 본다.
지난 글 "복음서 읽기 혁명" 에 쓰인 대로, 두 책을 나란히 펼쳐 놓고 이책 저책 동시에 주인공의 동선과 시간구간을 나란히 병행하여 읽어가겠다.
공책과 연필 곁들이면 효꽈 두배.
무덤에 간 여자들
인간(mortal) 예수 사망 시각은, 마태복음 누가복음 두 복음서는 금요일 오후 세시경 이라고 기록한다. 숨이 멈춘 예수, 무덤에 묻혔다.
예수를 따르던 여자들은, 망자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, 즉 장례를 위해 무덤을 찾았다.
아래는 예수사망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시간 순서로 널어 놓은 표이다.
1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마태복음 28장
1안식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누가복음 24장
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별반 차이 없어 보인다.
예수 사망, 무덤에 간 여자들 금요일 해지면서 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 유대 안식일 온전히 성수했다.
교회 언어로 '주일성수'. 토요일 해진 후 저녁 늦게 혹은 밤에라도 무덤에 갈 수 있었으련만.
빈 무덤에서 만난 천사
일요일 새벽,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이 겪게될 이야기가 마태 누가복음 서로 뚜렷한 차이를 아래 표에서 확인한다.
부활한 예수와의 만남
빈 무덤 확인 후 예루살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내달리는 여자들에게 예수가 나타나서 하는 말 - 마태복음이 전하는 기록이다.
빈 무덤을 확인한 여자들이 제자들 모인 곳으로 가던 중에 "부활한 예수와의 만남" 사건은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되어 있으나, 누가복음엔 없다.
그 발을 붙잡고 - "허깨비 본 거 아녀?" 라는 사람들의 질문 원천 봉쇄 의도가 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.
두 동작 "붙잡다" "만지다" 는 동시에 일어난다. 살과 뼈가 없으면, 허깨비이면 만져서 붙잡지 못하겠다.
제자들에게 알린 다음
빈 무덤 확인 후 여자들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기록은 서로 정확하게 "일치하지 않는다" 라고 말하기엔 좀 거시기 하다.
암튼 누가복음의 상당부분을 마태복음에서 볼 수 없다.
마태복음보다 기십년 후에 출간된 누가복음, 저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과 큐자료(Q-document)를 읽었을 것이다. 마태복음 28장 17절 "의심하는 자도 있더라" 이것이 전부인데 누가복음은 구구절절...
어떻게 의심했고 해소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하다고 누가복음 저자는 느껴서였을까?
생선구이 곁들인 밤참
부활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행동 묘사는 누가복음이 더 구체적이고 강한 설득력을 보이려 했음이 나타난다.
손발을 내보인다, 살과 뼈가 있쟎냐...
부활, 그게 뭔데? 죽기전 상태로 다시 살아난 거 아닌가? 살아났으니 손발에 살과 뼈 있는 거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?
실제로 부활했는데(부활했다면?) 굳이 이런 불필요하고 구질구질한 설명을 누가복음 저자는 해야 했을까?
"큰비 왔다" 이렇게만 말해도 사람들 다 안다 홍수난다는 것을. 부활! 이렇게만 말해도 다 알텐데... 허걱! 결정타! 생선구이 곁들인 밤참...
부활했다며?! 그걸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하기 위해 부질없는 얘기를 누가복음 저자는 왜 하지?
부활 예수와 마지막 헤어진 장소에 대하여
갈릴리로 가라, 거기서 너희들을 만나겠다...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진술이다.
누가복음은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 늦어도 월요일 오전 승천하기까지, 예수의 동선 - 예루살렘에서 동쪽 2킬로 떨어진 베다니 - 을 명확하게 진술한다. 그리고 베다니에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 갔다.
사람들과 부활 예수와 마지막 헤어진 장소에 대하여, 마태복음은 갈릴리(예루살렘 북쪽) 누가복음은 예루살렘(적확하게는 예루살렘 동쪽 약 2km 떨어진 베다니), 즉 간단하게 갈릴리냐 예루살렘이냐 이건데.
KTX가 있었겠나, 현대 쏘나타가 있었겠나 두발로 걸어서 가기엔 갈릴리, 베다니 가까이 하기엔 좀 된다... 방향도 다르다, 북쪽 동쪽...
결론: 위증
이 문제와 관련하여, 두 복음서의 저자가 오늘날 법정의 증언대에 선다면 둘 중 하나는 아니면 둘 다 위증의 처벌 받을 수 밖에 없다.
둘 중 하나 거짖(조작 or 창작)이거나, 둘 다 거짖(조작 or 창작)이거나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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